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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에버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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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인리히 에버바흐는 독일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14년 뷔르템베르크 군대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솜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전간기에는 경찰관으로 근무하다가 1935년 국방군에 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폴란드 침공, 프랑스 공방전, 모스크바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며,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연합군에 맞서 싸우다 포로로 잡혔다. 전쟁 후에는 미국 육군 역사 부서에서 근무했으며, 1992년 독일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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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에버바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1년의 에버바흐
에버바흐 (1941년)
출생일1895년 11월 24일
출생지독일 제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슈투트가르트
사망일1992년 7월 13일
사망지독일 노칭겐
별칭해당사항 없음
군사 복무
소속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복무 기간1914년–1920년
1935년–1945년
최종 계급[[File:General (Wehrmacht) 1.svg|30px]]기갑대장
지휘제4 기갑 사단
제5 기갑군
제7군
참전 전투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모스크바 전투
팔레즈 포위전
훈장
수훈기사 철십자장 백엽장
기타
이후 활동해당사항 없음
원어 이름Heinrich Kurt Alfons Willy Eberbach

2. 어린 시절과 경력

하인리히 에버바흐는 1895년 11월 24일 독일 제국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상인이었지만 에버바흐가 6살 때 사망하여, 어머니가 그와 다른 4명의 자식들을 돌봐야 했다. 1911년 레알슐레에 입학하여 1914년 6월 30일 아비투어를 취득하고 졸업했다.

1919년 12월부터 1935년까지 에슬링겐 암 네카어 및 슈투트가르트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했다. 경찰 중위, 경찰 대위, 1933년 경찰 소령을 거쳐 국가 지방 경찰국장까지 승진했다. 나치 정권 성립 후 독일의 군비 강화에 따라 군 복귀를 결심, 1935년 10월 소령으로 제12 대전차 대대장에 임명되었다. 1936년 8월 제3 기갑 사단 제6 기갑 연대장, 1937년 10월 중령으로 진급, 1938년 11월 제4 기갑 사단 (사단장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중장) 제35 기갑 연대장으로 전임되었다.[1]

2. 1.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하인리히 에버바흐는 1914년 6월 30일 아비투어(대학 입학 자격에 해당하는 고등학교 졸업장)를 받고, 1914년 7월 1일 뷔르템베르크 군대에 입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에버바흐의 부대는 서부 전선에 투입되었다. 1914년 7월 제10 뷔르템베르크 제180 보병 연대 제3 중대에 사관 후보생으로 배속되었다. 직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1915년 5월 저격병 연대 "오스트리아 황제·헝가리 왕 프란츠 요제프" 제122(제4 뷔르템베르크) 연대에 소대장으로 전속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위로 진급했다.[1]

1914년 10월 16일 에버바흐는 포탄 파편에 허벅지를 부상당했다. 솜 전투에 종군했으며, 1916년 9월 25일에 코에 중상을 입은 후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다.[1] 1915년 9월에는 코의 일부를 잃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혔다. 스위스의 병원에 입원하여 1917년 9월에 귀국했다. 1918년 1월까지 코 재건 치료를 받았다. 회복 후 예비 제122 보병 연대에 배속되었다. 1918년 9월, 소속 연대가 영국군에 항복했다. 종전 후 1920년 1월에 군을 떠났다.[1]

3. 전간기

1919년 12월부터 1935년까지 에슬링겐 암 네카어 및 슈투트가르트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했다. 처음에는 경찰 중위, 이후 경찰 대위를 거쳐 1933년에 경찰 소령으로 진급했다. 국가 지방 경찰국장으로 승진한 것이 경찰관으로서의 마지막 경력이었다. 나치 정권이 들어서고 독일이 군비 강화에 나서자, 군 복귀를 결심했다. 1935년 10월 소령으로 제12 대전차 대대장에 임명되었고, 1936년 8월에는 제3 기갑 사단 제6 기갑 연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37년 10월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1938년 11월 제4 기갑 사단(사단장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중장) 제35 기갑 연대장으로 전임되었다.

4. 제2차 세계 대전

에버바흐는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참여했고, 1940년에는 프랑스 공방전에도 참전했다. 그의 부대는 5월에 하소 폰 만토이펠 장군의 뫼즈 강 도하 작전을 지원했고, 6월에는 리옹으로 진격하였다.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시작된 직후, 그는 레오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의 제24 기갑군단에서 제5 기갑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3월, 툴라에서 서쪽으로 약 약 193.12km 떨어진 독일 전선에서 제4 기갑사단장이 되었다. 1942년 11월 말 에버바흐는 우라노스 작전 초기에 점령당한 제48 기갑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곳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간 지점 부근이었다. 에버바흐는 곧 부상을 입고 후송되어 2월까지 입원했다. 그 후 그는 국방군 기갑 부대 감찰관이 되었고,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중장으로 진급했다.

1943년 11월, 에버바흐는 니코폴 주변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고, 소비에트 연방의 지토미르 주변 전투에 참전했다. 1944년 초에는 기갑병 대장으로 진급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이후, 7월 2일 그는 레오 가이어 폰 슈펜베르크의 뒤를 이어 서부기갑군의 사령관 직을 맡았다. 8월 9일, 그의 부대는 분할되었고 대부분 파괴된 부대인 제5기갑군은 철수했다. 연합군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부대는 에버바흐 기갑집단으로 재편성했다. 에버바흐는 노르망디를 돌파한 연합군을 차단하기 위해 모르탱아브랑슈 사이에 반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공격은 실패했고 에버바흐 기갑집단과 제7군은 팔레즈 포위전에서 전멸했다. 에버바흐는 탈출해 8월 21일 남아있는 제7군의 잔병들의 지휘를 맡았다. 8월 31일 아미앵에서 그는 영국군에 포로로 잡혔다.[1]

4. 1. 모스크바 전투

모스크바 전투 동안, 에버바흐는 제4 기갑사단 예하의 연합 부대인 ''전투단(Kampfgruppe)'' 지휘관으로서 모스크바를 향한 제2 기갑집단의 공세를 이끌었다.[1] 공격은 9월 30일에 시작되었고, 이틀 만에 에버바흐 전투단은 완벽하게 돌파하여 120km 이상 진격했으며, 소련 브랸스크 전선 전체를 처참한 상황에 빠뜨리는 동안 자체 손실은 미미했다.[1] 에버바흐는 다른 사단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제3 기갑사단이 브랸스크 근처 작전 지역에서 벌이는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2개 대대를 분리하는 등 부대 지휘관으로서의 유연성을 보여주었다.[1] 10월 2일 초기에 발생한 소련 공습과 연료 부족에도 불구하고, 전투단의 공격적인 지휘관들은 오렐 시로 진격하여 소련의 산업 이전 노력을 종식시키고, 10월 3일 브랸스크 전선의 주요 통신 허브를 점령했다.[1] 에버바흐 전투단의 손실은 경미했다: 전차 6대 파괴, 병사 34명 사망, 121명 부상. 이는 소련 전선을 완전히 분쇄하고 이토록 전략적 가치가 있는 도시를 점령하는 데 따른 작은 대가였다. 제4 기갑사단 또한 에버바흐 전투단의 주도로 1,600명의 소련군을 포로로 잡았다.[1]

4. 2. 동부 전선에서의 활약

에버바흐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참여하였고, 우치 인근 기갑여단의 여단장으로써 활약해 바르샤바로 진격하였다. 1940년 프랑스 공방전에 참여해 뫼즈 강 도하 작전에서 하소 폰 만토이펠의 공세를 지원했다.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 하인츠 구데리안이 이끄는 독일 제24기갑군단 예하 제5기갑여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모스크바 전투 동안, 에버바흐는 제4 기갑사단 예하 연합 부대인 ''전투단(Kampfgruppe)'' 지휘관으로서 모스크바를 향한 제2 기갑집단의 공세를 이끌었다.[1] 9월 30일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틀 만에 에버바흐 전투단은 완벽하게 돌파하여 120km 이상 진격했으며, 소련 브랸스크 전선 전체를 처참한 상황에 빠뜨리는 동안 자체 손실은 미미했다. 에버바흐는 제3 기갑사단이 브랸스크 근처 작전 지역에서 벌이는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2개 대대를 분리하는 등 부대 지휘관으로서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10월 2일 초기 소련 공습과 연료 부족에도 불구하고, 전투단의 공격적인 지휘관들은 오렐 시로 진격하여 소련의 산업 이전 노력을 종식시키고, 10월 3일 브랸스크 전선의 주요 통신 허브를 점령했다. 에버바흐 전투단의 손실은 경미했다. 전차 6대 파괴, 병사 34명 사망, 121명 부상. 이는 소련 전선을 완전히 분쇄하고 전략적 가치가 있는 도시를 점령하는 데 따른 작은 대가였다. 제4 기갑사단은 에버바흐 전투단의 주도로 1,600명의 소련군을 포로로 잡았다.

1942년 3월, 그는 툴라에서 서쪽으로 약 약 193.12km 떨어진 독일 전선에서 제4 기갑사단장이 되었다. 1942년 11월 말 에버바흐는 우라노스 작전 초기에 점령당한 제48 기갑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곳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간 지점 부근이었다. 에버바흐는 곧 부상을 입고 후송되어 2월까지 입원했다. 그 후 그는 국방군 기갑 부대 감찰관이 되었고,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중장으로 진급했다.

1943년 11월, 에버바흐는 니코폴 주변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고, 소비에트 연방의 지토미르 주변 전투에 참전했다.

4. 3. 노르망디 상륙 작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동안, 에버바흐는 '주노'와 '소드' 해변에서 벌어진 영국군의 상륙에 맞서 싸웠다. 7월 4일, 레오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가 해임된 후(이틀 전), "서부 기갑집단"(나중에는 제5 기갑군)의 지휘를 맡았다. 8월 9일, 이 부대는 분할되어, 가장 피해가 심한 부대와 함께 제5 기갑군은 후퇴했고, 유효한 부대는 기갑집단 에버바흐로 재편성되었다.

에버바흐는 이 부대를 이끌고 노르망디에서 돌파한 연합군을 차단하기 위해 모르탱을 거쳐 아브랑슈로 반격을 지휘하도록 지시받았다. 에버바흐의 전후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이 공격에 대해 전혀 확신이 없었다. 8월 1일 OKW의 발터 발리몬트 장군이 "상황을 좀 더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그의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에버바흐는 그에게 "유일한 해결책은 센-욘느 선으로 즉시 후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발리몬트는 에버바흐의 철수 요청을 거부하고, 대신 공격 명령을 확인했다.

공격은 실패했고, 기갑집단 에버바흐와 제7군의 대부분은 팔레즈 포위전에서 포위되어 파괴되었다. 에버바흐는 탈출하여 8월 21일 제7군의 잔여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8월 31일 에버바흐는 아미앵에서 영국군에게 기습당해 포로로 잡혔다.[1] 그는 나중에 브라이언 호록스 중장에게 소개되었다.

4. 4. 포로 생활과 전후

에버바흐는 1948년까지 전쟁포로 수용소에 갇혀있었다.[1] 이후 고향 뷔르템베르크로 돌아가 1992년 통일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서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포로 수용소인 트렌트 파크에서의 에버바흐.


에버바흐는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프란츠 할더의 지도하에 독일 장군들이 미국 육군을 위해 제2차 세계 대전 작전 연구를 작성하는 미국 육군 역사 부서의 작업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포로 신분으로, 그 다음에는 직원으로 참여했다.[1] 에버바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과 의 사령관이었던 해군 장교 하인츠-오이겐 에버바흐의 아버지였다.

1944년 8월 31일, 정찰 행동 중 아미앵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영국의 트렌트 파크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1948년 1월에 석방되었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노칭겐에서 사망했다.

5. 저작

Panzer Group Eberbach and the Falaise Encirclement|에버바흐 기갑 집단과 팔레즈 포위전영어 (1945년–1954년)

6. 서훈


  • 철십자 훈장 2급 (1914년 10월 12일) 및 1급 (1917년 11월 10일)[1]
  •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 1940년 7월 4일, 중령 계급, 제35 기갑 연대장

:** 1941년 12월 31일, 대령 계급, 제5 기갑 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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